2023년 3월 5일 일요일

워크맨

 

오래된 160기가 아이팟 클래식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이미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나는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애플뮤직이 시작한 뒤에는 아이폰과 아이팟을 번갈아 쓰고 있었다. 애플뮤직이 무손실 음원을 지원한지는 두 해도 되지 않았지만 아이팟은 처음부터 애플 losless 파일, AIFF 파일을 재생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며 좋은 음질로 음악을 듣기엔 여전히 최고였다. 아이폰은 다른 할 일이 많아서 음악을 듣는 데까지 쓰고 있으면 쉽게 배터리가 닳았다. 그러면 종일 충전하느라 바빠야 했던 것이다.

애플은 지난 해 아이팟 제품군의 마지막 모델마저 단종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뭐, 놀랍지 않은 선언이었다. 나처럼 작은 디스플레이와 휠 컨트롤만 있는 아이팟 클래식이 계속 나와주길 바라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시대가 변했고 애플도 변했다. 음악만 들을 수 있는 아이팟 클래식의 명맥을 계속 이어가면 어때요, 라는 사람들이 애플 안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슨 소리야, 에어팟을 팔고 애플뮤직 구독료를 받아내야지", 라는 사람들이 아마 이겼던 것이리라.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나는 가장 최근에 나온 소니 워크맨을 샀다. 워크맨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처음 가져본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는 소니 WA-55였다. 열세 살 이후 이십여년 동안 소니, 산요, 아이오와 플레이어들을 사느라 남대문시장과 세운상가를 쏘다녔다. 맨 마지막 것이 산요였는지 샤프였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어쨌든 소니에서는 오랜 전통을 이어 '워크맨'이라고 광고하고 있으니까 새 기기도 그렇게 불러주기로 했다.

아이팟으로 계속 버텨보고 싶었으나 간단한 동기화를 하는 데 언제나 애를 먹였다. 30핀 케이블을 바꿔보아도 컴퓨터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이팟에 담겨있는 음악들은 이제 그안에 그대로 남아서 어느 쪽으로도 옮겨지지 못하고 화석처럼 굳어지고 있다.

재작년 애플뮤직에서 고해상도 무손실 음원을 제공하기로 한 뒤에는 점점 아이폰에 다운로드 하여 음악을 듣는 일이 더 많아졌다. 맥에서 파일을 다운로드 하여도 어차피 애플뮤직에서 받은 음원은 아이팟에 담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 육년 넘게 새로 나오는 음악들은 아이폰으로만 듣고 있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시디를 구입하여 아이팟에 담기 위해 리핑하는 일은 거의 해보지 않았다.

애플뮤직은 안드로이드에서도 쓸 수 있으니까 용량이 큰 외장 메모리에 가지고 있는 음악들을 모두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새해에 이 기기가 나올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었다. 발매를 시작한 후 매뉴얼을 다운로드 하여 읽어보았더니 이 기기는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용도에 딱 맞는 것이었다. 구실을 만들었으니, 구입하기로 했다.

 
우선 512기가짜리 마이크로SD 안에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 있는 음악들을 모두 담았다. 그것을 마치는 데 열 여섯 시간이 걸렸다. 아이팟을 자주 동기화했어야 했던 이유는 용량이 모자라 이것을 지워 공간을 만든 뒤 저것을 담는 식으로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소니 플레이어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와이파이와 블루투스는 가능하지만 전화기가 아니니까 통신 데이터는 쓸 수 없다. 나는 애플뮤직 앱을 설치하고 이동 중에는 아이폰에서 개인 핫스팟을 켜서 테더링하여 쓰기로 했다. 통신 데이터에서도 고해상도 무손실 음원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지만, 데이터를 많이 소모한다. 가지고 다니며 듣고 싶은 음악은 미리 다운로드 해두는 것이 좋다. 나는 아이폰에서 설정해둔 것과 같이 통신 데이터에서는 24비트/48KHz lossless 파일까지 들을 수 있도록 해뒀다. 와이파이로 스트리밍을 하거나 다운로드 할 때엔 24비트/192KHz 음원을 들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아이폰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기기는 음악 재생만을 위한 것이어서, 더 좋은 음질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고해상도 스트리밍' 기능을 켜놓았을 때 32비트/192KHz 의 품질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애플뮤직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

음악만 듣기 위한 기기가 필요했던 것이므로, 소니 뮤직플레이어와 애플뮤직 외에 사용할 일이 없는 다른 앱들은 지웠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오래 전에 저장했던 낮은 비트율의 파일들을 lossless 파일로 바꾸는 작업을 틈틈이 하고 있는 중이다. 저장 공간이 충분해졌으니 AAC로 리핑해뒀던 것들을 지우며 시디를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한 장씩 새로 하드디스크에 옮기고 있다. 그것을 다시 소니 플레이어에 넣은 다음 새 시디를 샀을 때처럼 차분하게 들어보고 있다.

소니 워크맨으로 시작하여 카세트 플레이어들로 이십년, 아이팟으로 이십년, 이제 새로 소니 DAP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2023년 3월 3일 금요일

TV Show


일부러 그런 적은 없는데, 이 장소에 오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전날 잠을 못 잔다. 지난 번엔 알람을 무시하고 늦잠을 자던 나를 도왔던 전등이 이번엔 새벽 세 시에 저절로 켜졌다. 스위치를 교환해버려야 할 것 같다. 새벽에 깨어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티브이 쇼라는 것을 하는 날엔 언제나 피하고 싶은 일들이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다. 항상 급하고 분주하고 정신 없는 리허설. 분장. 거기에다 기자들이 초 단위로 사진을 찍어 송고하는 데에 동원되어 '손가락 하트 해주세요'라는 요청을 받는 등의 일들.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나에겐 힘들고 고되다.

오늘 좋았던 것은 녹화가 아니라 생방송이라는 것이었다. 연주하는 것이야 늘 하는 일이니까 편했다. 힘든 일을 한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집에 돌아와 몸을 씻고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2023년 2월 28일 화요일

여유

 

다른 목적 없이 사람들을 만나러 외출을 해보는 것이 오랜만의 일이었다. 가게 안에 하나 둘 손님들이 들어오더니 자리가 가득 차고 점점 소란스러워져서 피로감을 느꼈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소음이 가득한 작은 공간 바에 앉아보았던 것도 정말 한참만의 일이었다. 소음 속에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JBL 4307 에서 나오는 고음이 나를 기분 좋게 해준 것인지, 내가 기분 좋게 한 잔 홀짝거리느라 음악이 더 좋게 들렸던 것인지.

가게에서 나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시원한 밤길을 걸었다. 초조한 마음도 바쁠 것도 없는 기분에 잠깐 취해 있었다. 그것은 현실을 잊고 괜히 부려보는 여유일지도 모르는데, 여유 좀 부리며 살면 뭐 어떤가 싶고.

2023년 2월 25일 토요일

우연

군포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몇 년만에 다시 가본 장소였다. 이곳은 잘 지어지고 세심하게 관리되는 극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그곳에 갔을 때에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예민한 일에 사로잡혀 새벽 시간을 허비하고 아침에 잠들었다가 나는 그만 알람이 울리는 것을 꺼버린 다음 잠을 더 잤다. 하마터면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할 뻔 했다. 아내는 오전에 외출했고 고양이들은 거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은 내가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갑자기 방에 전등이 켜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별안간 밝은 불빛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기 때문에 낭패를 겪지 않을 수 있었는데, 왜 마침 그 순간에 불이 저절로 켜졌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나를 도왔다.

전날에 허리 통증이 심하여 힘들어 했었는데, 정신없이 서둘러 나와 공연장에 도착하여 리허설을 마치고 난 다음 갑자기 팔과 등에 근육경련이 일어났다. 어떤 물질이 내 몸을 돌아다니며 골탕을 먹이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스트레칭을 해도 나아지지 않더니 대기실에 있는 낮은 의자 위에 반듯하게 누워 쉬고 난 다음에야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공연을 시작한 뒤에는 아프지 않았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나 보다.

어제 나는 하드디스크에서 육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찍었던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아이폰 7로 찍었던 사진이었는데 리허설을 준비할 때의 장면인 줄 알고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면서 사운드체크, 리허설이라는 해쉬태그를 써놓았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확인해보니 리허설이 아니라 공연이 끝난 후 무대를 정리하는 순간의 사진이었다. 사진 정보에 시간이 기록된 덕분에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