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5일 금요일

평가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도 어쩌다 보니 십오년째가 되었다. 그 이전에 입시생들을 가르쳤던 것을 더하면 어린 학생들을 마주하며 지내온지 이십여년. 무슨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벌 수도 없는 일인데 왜 나는 계속 하고 있었을까. 아마 나는 연주를 하는 것만큼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나 보다.

자신이 즐겁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으면 더 이상 즐겁거나 좋아하기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도 있어서, 매 학기를 마칠 때마다 항상 괴로운 업무를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채점하여 등급을 정하는 일이다.

물론 다른 어떤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과 악기연주라는 것도 평가할 수 있고 각자의 성과를 숫자로 매길 수 있기는 하지만, 학생들의 과제와 시험답안지들을 눈 앞에 두고 깊은 밤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은 무겁고 힘들다. 그들만의 목소리가 있듯이 그들만의 음악도 있는 것이고, 그 개성을 기록과 수치로만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학생들의 테크닉과 실력의 차이를 점수로 줄 세운다는 것이 과연 음악적인 일인지 나는 의심한다.

그러나 이곳은 학교이고, 어떤 학생이 한 학기 동안의 학업을 해온 과정과 결과를 평가해야 하는 것 또한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평가의 결과가 충분히 공정하려면, 우선 가르쳤던 사람이 성실하였어야만 한다. 나는 학생들의 점수를 합산하기 위하여 내가 만들어 놓은 스프레드 시트의 수식을 보완하면서 수업시간마다 기록해 둔 학생 개개인에 대한 문서들을 열 번 스무 번 읽는다. 내가 항목별로 작은 숫자들을 입력해나가면 맨 끝에 그 학생의 총점이 계산되도록 해두는 이유는 어쩌면, 내 손으로 직접 그 합산된 점수를 입력하지 않아도 좋도록 하여 괴로운 업무의 마지막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한 마음 때문일 수도 있다.

학생들이 완성한 과제물들, 때로는 레포트들을 반복하여 듣고 읽다보면 수업시간의 내가 보인다. 과연 내가 그 수업들을 매 시간 성실하게 준비했는지, 학생들에게 바르게 길을 알려주고 필요한 순간에 해줄 수 있는 말을 전할 수 있었는지, 그보다 앞서 어린 학생들 앞에서 나의 태도는 바르고 진실했는지를 스스로 비판해보고 반성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점수 매기는 그 시간은 나 자신에 대한 평가의 시간이기도 했다.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타인에 대하여 너그러운 자세를 가지게 해준다. 나는 학생들이 터무니 없는 이유로 결석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 내가 힘주어 여러 번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무라고 싶지 않다. 그럴 수도 있다. 그들로부터 기대했던 수준의 과제물을 받지 못하여도 그것은 학생들의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절반은 나의 탓일 테니까. 그리고 대학에서의 한 가지 과목 정도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다지 큰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지금 모자란 배움은 언젠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충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니까, 다 괜찮다. 나의 '일'이기 때문에 점수는 매기고 있지만, 겨우 학점이란 것으로 학생들이 자신에 대한 가치를 주제 이상 높게 여기거나 낮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심지어 일찌감치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수업은 제껴버리고, 임기응변으로 변명을 늘어놓고, 때로는 거짓말로 선생을 기만하는 것도 괜찮다. 약속을 어기거나 모든 일에 핑계를 만드는 것도 좋다. 거기에서부터는 자유의 영역이다. 아직 어릴 때에는 그럴 수도 있는 법이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이 곧 그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을 납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학생일 때에 자신의 일을 그런 수준으로 밖에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음악을 잘 할 수는 없다. 음악을 잘 할 수 없을 사람에게 나는 가혹하게 점수를 매긴다. 그것도 지금 내가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