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9일 월요일

공해.


무지와 반지성주의 공해.

오래 전에 어떤 ‘프로 연주자’는 나이 어린 후배들을 불러 앉혀 놓고, ‘악기는 죽어라 연습만 한다고 잘 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다 손바닥에서 기(氣)가 나와야 한다.’ 라고.


훗날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그와 똑같은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그들이 아마, 장풍이라든가 에네르기 파 같은 것도 진지하게 믿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팔십 년대 중반에 소설 단(丹)을 내어 돈을 많이 벌었던 출판사가 있었다.
(아마 아직도 있을 것이다.)
주로 서양의 정신세계는 동양의 그것 보다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들, 한국의 도인들이 일제시대에 독립문을 맨 몸으로 뛰어 넘었다던가, 한반도의 남북이 통일이 되면 영토가 만주까지 뻗어나가서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전 세계의 최강국이 될 것이다… 같은 책들을 참 많이도 펴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어쩌면 한국인들은 너무 심한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 잡혀 살고 있는 중이구나, 싶었다. 그것에 비하면 그보다 몇 년 전 흥행 했던 장총찬이 못된 애들을 때려 주는 소설이 오히려 나았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점점 쏟아지듯 많이 나왔다. 그 책들은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나 과학적인 증명 따위는 소설로 쓰고, 허구와 소설의 플롯은 사학이나 연구결과 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런 책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UFO와 고대문명… 아틀란티스, 무 대륙, 신나치 등을 다룬 책들도 서점에 많이 꽂혀 있었다. 보통 일본의 책을 번역해 온 것들이 많았다. 남극에 숨어있는 독일군 기지, 잊혀진 대륙이 사실은 아직 남아 있어서 비행물체를 자꾸 지상에 보낸다는 이야기,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이 원래 있었다는 설 등등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 책들을 읽다 보면 앞뒤 맥락과 상관 없이 갑자기 일본에 대한 내용이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올 때가 있었다. 기억에 오래 남아버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인은 원래 태평양 한 가운데에 가라 앉은 잊혀진 대륙에서 온 민족이다. 그러므로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태평양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인이 되기는 싫어했던 어떤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듣기 좋은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평양에 있었다던 무 대륙의 이야기는 그 개념 자체가 백인종들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기라고 해도 좋다. 초고대문명설이라는 것을 말했다던 처치워드라는 인물 자체가 사기꾼이었다. 그것을 가져와 일본인이란 원래 태평양에서…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도 알고 보면 어떤 사람들의 딱한 사정이 있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세상엔 이런 것을 써서 책으로 만들어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이구나, 그런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와서 환단고기니 맥이라느니 무슨 무슨 명상이니 따위의 사이비역사학과 유사과학들이 대중들에게 믿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광경을 계속 보게 되니 정말 정신이 아득해진다는 표현이 딱 맞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과 책들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굳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운이 빠지는 일일텐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 환호하고 감격해 한다. 그래서 가짜역사학자들, 가짜과학을 떠드는 사람들은 무식할 뿐 아니라 사악하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김진명의 소설들이 사실은 실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사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어디 역사와 과학만 그런가. 종교, 예술, 의료분야에도 반지성주의는 가득하다.
학문에 근거한 비판을 오히려 조롱하고 억누르는 분위기의 사회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흘러가기 쉽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 어쩌면, 그나마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엔 너무 위태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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