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9일 금요일

겨울이 온다.

카메라가 고장나버렸다.
이미지를 첨부하지 않고 블로그에 무엇을 적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매일 밤 연주하고 새벽에 귀가하고 있다. 다시 완전히 밤생활로 돌아왔다.
서울의 강북을 밤새 달렸다. 하염없이 밀려서 다닐 때가 더 많다.
생활이 서울의 북쪽으로 바뀌다보니 다리를 건너 강남쪽으로 마실을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어제 저녁에는 구불구불한 도로와 암호같은 표지판들 밑으로 그림처럼 바삐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쩐지 이것이 정말 서울의 풍경이었지, 라는 생각을 했다. 정방형이 아닌, 큼직하지 않은, 폭력처럼 규격화된 입간판들이 없는 도시가 서울이 아니었었나, 하는.
서울에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꼬물거리며 밀려다니고 밥을 먹고 웃고 울고 빼앗고 상실하며 살 수 있는지.

돈벌이를 위한 연주일 때문에 손이 굳지 않으면 좋겠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오히려 짐이 되어버렸다. 내 성격 탓인지 배우는 사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더 조바심을 내며 레슨을 하는 것 같다.

새벽에 창밖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존재는 외롭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면 금세 죽어버리는줄 알고 있다.
물건을 사고 술을 마시고 우정을 고르고 사랑을 구입하려하지만 어차피 존재란 것은 몹시 외롭다. 그것을 우선 인정하는 것이 참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새 물건이나 술잔이나 전화하면 불려나오는 친구들이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지 않다.

바람이 싸늘해졌다.
겨울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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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일 화요일

카메라 고장.

며칠 전 아침에 카메라가 고장났다. 그것을 수리하여 알뜰하게 더 써보고 싶었다.
고객센터라는 곳의 전화상담원이 카메라의 모델 등을 묻더니 '새것을 사서 쓰시지 그러세요.'라고 했다.
그의 말이 맞긴 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잔머리를 굴리며 남을 이용하고 사심으로만 가득찬 사람들을 제법 많이 만나봤다. 그들이 밉다거나 싫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인정해주는 편이다. 그래, 그렇게 살으시라, 하는 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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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24일 일요일

참을성.

한 해 동안 뭔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참을성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든 사물에게든 웬만한 일로는 화가 나지 않는다. 흥분하는 일도 적다.
인격이 더 나아졌을리는 없다. 좀 더 멍청해졌거나 무감각해진 것 같다.
참을성은 늘었지만 똑똑해지지는 못하였다.
판단은 언제나 늦고 여전히 어리석다.

심야에 약속이 취소되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자주 들르는 바에 잠깐 머무르기로 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음악을 듣다가 집에 돌아오고 싶었었다.
그런데 평소에 상대하기 싫고 성가셔하던 사람들이 들어와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먹기 시작했다.
상관하기 싫었다. 작은 소란이 일어났고 나는 창피했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창피했다.
예전에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 곁에는 앉지도 않았고 말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언제부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일일이 응대를 했던 것일까.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레슨생이 사정이 생겼다고 하며 화요일로 약속을 옮겼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했다.
다행하게도 아직 집을 나서기 전이었다. 오전 즈음에라도 전화를 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날씨 좋은 가을 오후를 자는 것으로 보내버렸다.
몇 달 전부터 같은 꿈을 반복하여 꾸고 있다.
친구인지 누구인지의 집에 모임이 있어서 초대를 받아 참석한다. 아는 얼굴들도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다. 듣고싶지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밖으로 잠시 나와 혼자 산책을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얼굴이 똑같이 생긴 두 녀석이 (꼭 한 놈은 키가 작다) 내 앞에 나타나 가로막더니 내 얼굴에 가루를 뿌린다. 그러면서 '다 너를 위한거야'라고 말한다. 가루는 흰색일 때가 많다.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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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23일 토요일

다급했던 이야기.

약속 한 시간 전에 지하 3층 주차장에 내려갔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며 들을 음반을 골라 틀어놓은 뒤 유유히 출발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지하 3층 주차장 출구가 사라졌다. 하나뿐인 주차장 출입구에 셔터문이 내려져있었던 것이었다.
지하 3층에서 1층 수위길까지 뛰어 올라갔다. 관리해주시는 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 3층에 내려가 직원이 와주기를 기다렸다. 1분이 아까왔다. 만일 10분이 지체된다면 지각을 할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한참 동안 11층에 머물러있었다. 십여 분을 기다린 후에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1층까지 왔다가 다시 올라가버렸다. 나는 다시 1층 수위실에 뛰어 올라갔다. 관리인 아저씨는 인터폰으로 누군가에게 아까와 똑같은 말을 다시 했다.

직원이 내려와서 셔터문을 열어준 것은 아홉 시 오십 분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왜 늦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간단한 대답을 했다. '밥 먹느라고요.'

나는 미친듯이 도로를 달렸다. 분명히 과속단속 카메라에 촬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분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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