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4일 수요일

애플 뮤직 클래시컬

 

 애플뮤직 클래시컬이 한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앱을 미리 다운로드 해놓고 "이제 사용할 수 있다"는 알림이 보이자마자 이어폰을 연결하여 들어보기 시작했다. 기돈 크레머, 주빈 메타, 마르타 아르헤리치, 빈 필하모닉 등의 이름을 오랜만에 보았다. 애플뮤직에서 기획한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목록에서 음악을 골라 듣기도 했다.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음반을 들었다. 2006년에 나온 여섯 장짜리 시디, 여섯 시간 반이 넘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이다. 작년에 손열음 씨가 낸 앨범과 같은 곡 구성이다. 손열음의 모차르트 컴플리트 소나타엔 한 곡이 없고, 그래서 전체 시간은 여섯 시간 이십 사분이었다. 두 사람의 연주는 질감이 다르고 호흡도 다른데 짚어내기 어려운 정서적인 닮은 점이 있다. 하루를 잡아서 한 악장씩 두 앨범을 비교하여 들어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열 세 시간을 쉼 없이 집중하여 음악을 듣기란 어려울 것이다. 한 번에 시디 한 장씩, 그렇게 들어보면 좋겠다.

2024년 1월 23일 화요일

물건

 

 사람은 도구로 생각한다. 솜씨는 손을 놀려 하는 재주다.

어떤 물건을 쓰느냐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어 준다.

사람은 물건으로 사유한다는 말이 오늘은 많이 생각 났다.

2024년 1월 22일 월요일

음악

중학생 시절 나는 매일 긴 시간 음악을 듣고 살았다. 그 시절 똑같은 음악을 끝없이 반복하여 듣고 있던 것이 정말 얼마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무손실 음원, 리마스터 된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듣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또 멀고 먼 옛 이야기라는 게 체감된다. 사십년 전 자주 듣고 있던 음악을 지금 좋은 음질로 다시 들어보고 있으면 중학생 때 카세트 테이프로 듣고 있었던 시절 그 음악들도 음질이 좋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명 어떤 테이프는 소리가 먹먹하거나 트레블이 지나치게 들려서 힘들어 했었는데 마치 지금 깨끗한 음질로 듣고 있는 이 음악 그대로 과거부터 듣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오늘 아침엔 Joe Henderson의 'Lush Life'를 듣고 있었다. 1992년에 나는 이제 막 나온 시디를 사서 그것을 양손으로 쥐고 집에 돌아와 경건하게 비닐을 벗겼었다. 어딘가 저 높은 곳에 있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수준의 연주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애플뮤직에 고해상도 무손실 음원으로 올려져 있고, 좋은 음질로 다시 듣고 있다. 그런데 애플뮤직에 어째서 'So Near, So Far' 앨범은 없는지 모르겠다. 오래 전 내가 m4a 파일로 변환해둔 것이 보관함에 간신히 남아 있는데 도저히 원본 시디를 찾지 못하겠다.
 

2024년 1월 13일 토요일

고양이 이지

 

방 안에 햇빛이 들어오고 어렴풋 소리가 들렸다. 그릇 소리, 고양이를 어르는 말 소리가 들리고 있어서 잠이 덜 깬 채로 밖으로 나갔다. 아내가 이지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었다. 아내와 이지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서 고양이가 고개를 흔들어 여기저기 뿌려둔 습식사료 파편들을 닦아 치웠다. 이지의 입 안에 곱게 갈은 습식사료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떠먹여주는 일을 하루에 세 번, 아내가 혼자 맡아서 하고 있다. 그렇게 일곱 달째 고양이를 먹이고 있고 여전히 이지의 혈당 수치는 백 몇 십이 나오고 있다. 스스로 먹지 못하는 나이 든 고양이에게 건조사료 대신에 깡통사료를 먹이기로 아내가 결정하고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이지의 당뇨병은 악화되었을 것이다. 비싸고 힘든 비용과 노력을 들여 고양이를 보살피고 있는 중이다.

베란다에도 햇빛이 잔뜩 들어오고 있었다. 창유리 앞에 서서 겨울 한 가운데에 있는 바깥을 내다 보았다. 이 집에 이십 년째 살고 있는데 처음 이사했던 날처럼 아직도 아파트 10층은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떠난지 8년이 된 순이를 아직도 그리워 하고 있다. 찬 바람에 선뜩한 기분이 들 때처럼, 문득 보고싶어지고 가끔은 슬퍼진다. 애정, 교감, 좋아하는 마음은 생의 대부분을 힘들게 만든다. 함께 숨 쉬고 서로 체온을 느낄 수 있을 때 그 잠깐의 기억을 달이고 고아 마시며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