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에는 앓았던 적이 없었다.
정신적으로는 바닥을 기어다녔는데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던 탓이었는지 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올해 여름부터, 자주 많이 아팠다.
어제 밤에는 며칠 고생하던 배앓이가 낫는 듯 하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겨 새벽에 옷을 얇게 입고 어두운 거리를 뛰어 나갔었다.
그것이 나빴나보다.
얇은 외투를 다른 곳에 벗어두고 반팔 셔츠만 입은채 되돌아와야했다.
또 배탈이 나서 중간에 택시에서 내려야했다.
정신을 추스리겠답시고 몇 킬로를 걸어서 돌아왔다.
결국 감기에 걸렸다.
이제는 버텨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꼭 약을 사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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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4일 목요일
2004년 9월 29일 수요일
추석.
달 밝은 가을밤이었다.
추석. 옹졸한 가족이기주의와 사욕의 날.
자기만족, 생색, 이기심, 타인에 대한 무관심, 보상심리가 송편으로 빚어져 밥상 위에 올랐다.
이유없이 새벽부터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3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안주로 삼아 먹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제법 느끼하고 괜찮다.
아침에는 누군가가 마음을 다칠까봐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술을 마신 김에 이곳에 적어둔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에게 나는 우호적이지 않다.
당신의 딸이 선생이라면, 일반적인 인문학적 상식은 공부해뒀어야 맞다. 그것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의 인성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무식해지려는 노력은 해야 옳다.
우리 집안의 교사들 중 정의와 사랑,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격의 고양을 가르칠 사람들이 몇 분이나 될까. 한 분 정도일까.
그놈의 종교. 죽음을 저당잡아 벌이는 다단계 사업.
무엇을 골랐더라도 당신들의 본능은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내가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이다.
역겹다. 구실을 만드는 것은 익숙하지만 역사의식이나 인륜은 먼 곳에 두고 그만 잊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계발하지 못했다. 내 자식을 사랑하고 내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만 본질은 전부 너희들의 욕망이다. 명절은 욕망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 모여서 음식을 나눠먹기가 되었다. 최소한 빼앗아 먹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치 이야기, 얼마든지 해도 좋다. 정치란 원래 안주거리이다. 그러나 토할 것 같으니까 제발 사회정의 운운하지 않으면 좋겠다.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거나 죽었던 사람, 우리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출세를 위해 애쓰다가 잘못된 줄에 섰던 사람들이나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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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옹졸한 가족이기주의와 사욕의 날.
자기만족, 생색, 이기심, 타인에 대한 무관심, 보상심리가 송편으로 빚어져 밥상 위에 올랐다.
이유없이 새벽부터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3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안주로 삼아 먹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제법 느끼하고 괜찮다.
아침에는 누군가가 마음을 다칠까봐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술을 마신 김에 이곳에 적어둔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에게 나는 우호적이지 않다.
당신의 딸이 선생이라면, 일반적인 인문학적 상식은 공부해뒀어야 맞다. 그것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의 인성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무식해지려는 노력은 해야 옳다.
우리 집안의 교사들 중 정의와 사랑,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격의 고양을 가르칠 사람들이 몇 분이나 될까. 한 분 정도일까.
그놈의 종교. 죽음을 저당잡아 벌이는 다단계 사업.
무엇을 골랐더라도 당신들의 본능은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내가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이다.
역겹다. 구실을 만드는 것은 익숙하지만 역사의식이나 인륜은 먼 곳에 두고 그만 잊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계발하지 못했다. 내 자식을 사랑하고 내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만 본질은 전부 너희들의 욕망이다. 명절은 욕망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 모여서 음식을 나눠먹기가 되었다. 최소한 빼앗아 먹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치 이야기, 얼마든지 해도 좋다. 정치란 원래 안주거리이다. 그러나 토할 것 같으니까 제발 사회정의 운운하지 않으면 좋겠다.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거나 죽었던 사람, 우리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출세를 위해 애쓰다가 잘못된 줄에 섰던 사람들이나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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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27일 월요일
구멍이 났다.
어제 오전부터 조금 전 아침까지.
아아, 서울은 넓다. 도시의 동서남북을 옮겨 다니며 200킬로미터는 달렸나보다.
아침에 해가 솟을 즈음 한쪽 바퀴가 주저앉았다.
보험회사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겨우 난감한 상황을 모면했다.
도움을 준 친구에게도 고맙고 추석연휴인데도 이른 시간에 문을 열어준 정비업체에게도 고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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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31일 화요일
태능신앙촌.
태능 선수촌은 신앙촌인가보다.
가관이다.
기독교 국가,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나라의 선수들도 한국의 선수들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 없다. 이슬람 국가의 선수들이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알라를 외치는 모습을 본 일 없었다.
각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도 운동선수들이 기도하는 모습에 대한 글이 올려져있었다. 읽으나 마나 그들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유치하고 졸렬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의 신은 고작 금메달을 따주거나 8강, 4강에 오르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면 서울시를 봉헌 받거나.
이원희는 한판승으로 상대를 누르고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하고 팔을 벌리는 몸짓을 벌였다. YTN에 출연하여 그 모습에 대해 백지연이 물었더니,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온전히 바치는 몸짓'이었다고 했다. 경기 중 힘겨울 때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떠올렸'다고도 했다.
태권도의 문대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멋있게 이겼거나 힘겹게 이겼거나 간에, 승리한 직후 관중석에 올라가 태권도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는 사람들을 껴안고 기쁨을 누린 것도 사사로울 뿐 밉게 볼 필요는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꿇어 앉더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선수생활 도중 절에 숨어들어가 잠적한 적도 있었다가, '선수촌'에서 후배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역도선수도, 축구선수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하나님은 종목별로 영광을 받느라 무척 바빴다. 예수를 매달았던 유태인들은 모두 게임에서 졌어야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선수들의 모습을 두둔하면서 '우리나라의 신앙양태가 다른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어떤 목사가 컬럼을 쓴 적이 있었다. 지난 월드컵 때의 일이었다. 그의 긴 글 중에서 위의 한 줄 문장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모이는 대형교회들과, 폐쇄적이고 부패한 체육관료주의와, 한 번도 정의로왔던 적은 없었던 언론들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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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이다.
기독교 국가,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나라의 선수들도 한국의 선수들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 없다. 이슬람 국가의 선수들이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알라를 외치는 모습을 본 일 없었다.
각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도 운동선수들이 기도하는 모습에 대한 글이 올려져있었다. 읽으나 마나 그들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유치하고 졸렬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의 신은 고작 금메달을 따주거나 8강, 4강에 오르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면 서울시를 봉헌 받거나.
이원희는 한판승으로 상대를 누르고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하고 팔을 벌리는 몸짓을 벌였다. YTN에 출연하여 그 모습에 대해 백지연이 물었더니,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온전히 바치는 몸짓'이었다고 했다. 경기 중 힘겨울 때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떠올렸'다고도 했다.
태권도의 문대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멋있게 이겼거나 힘겹게 이겼거나 간에, 승리한 직후 관중석에 올라가 태권도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는 사람들을 껴안고 기쁨을 누린 것도 사사로울 뿐 밉게 볼 필요는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꿇어 앉더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선수생활 도중 절에 숨어들어가 잠적한 적도 있었다가, '선수촌'에서 후배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역도선수도, 축구선수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하나님은 종목별로 영광을 받느라 무척 바빴다. 예수를 매달았던 유태인들은 모두 게임에서 졌어야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선수들의 모습을 두둔하면서 '우리나라의 신앙양태가 다른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어떤 목사가 컬럼을 쓴 적이 있었다. 지난 월드컵 때의 일이었다. 그의 긴 글 중에서 위의 한 줄 문장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모이는 대형교회들과, 폐쇄적이고 부패한 체육관료주의와, 한 번도 정의로왔던 적은 없었던 언론들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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