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6일 일요일

이른 아침

 

일요일 이른 아침에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에 가보았다. 역사 깊고 오래된 곳이라고 들었다. 한강 쪽이 아니라 동네의 내륙 쪽 산길에서 아침 산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절 마당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찰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괜한 기대를 했었는가 보다, 하며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어디에선가 고양이가 나타나더니 단숨에 내 앞으로 뛰어 왔다.

한 마리가 아니라 이쪽 저쪽에서 고양이들이 튀어나와 꼬리를 높이 들고 반가와 했다. 검색을 해보니 그 절은 고양이들이 여러 마리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고양이들을 만나는 바람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인사하고 쓰다듬어 주며 시간을 보내게 됐다.

고양이들은 전부 한쪽 귀 일부가 잘려져 있었다. 모두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는 표식을 해둔 것이다. 나이 어린 고양이들은 건강하고 즐거워 보였다. 배가 고파서 사람을 반기는 게 아니라 간식, 별식이라도 가지고 왔느냐고 하며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라고 말을 해줬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들에게 친절했던 것 같다. 애들이 다 구김 없고 편안해 보였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뛰고, 계단을 달려 오르다가 볕이 드는 곳에 멈춰 몸을 핥고 있기도 했다.

산길을 내려와 아침 일찍 문 여는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식당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산 속에 있던 녀석들과는 다르게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길래 가까이 다가갔더니 얼른 뒤돌아 내빼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기지개를 켜고 있는 우리 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챙겨 줬다.



 

2026년 4월 23일 목요일

아내의 그림

책꽂이 위에는 우리와 함께 살았던 고양이들이 있다. 모두 아내가 그린 그림들이다. 낡은 종이 냄새가 나는 수십 년 된 책을 한 권 꺼내어 보다가 내가 아직 이것을 왜 가지고 있는가, 생각했다. 몇 권은 버려도 된다. 사실 거의 다시 펼쳐보지 않는 책들은 모두 버려도 되는 것 아닐까. 어디 책 뿐인가, 저기에 있는 플라스틱 CD들이나 손 댈 일이 없는 오래된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나는 한 개도 버리지 못하고 집안 가득 두고 앉아 있다.

감정, 느낌, 그리움은 기억 속에 있다. 어느날 자아를 잃으면 기억은 그 모든 마음들을 다 끌어 안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 형체도 없는 지나 온 세월들을 품에 품고 싶은 것인지.  그것들이 물건 속에 담겨 있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벌써 오래 전에 떠나버린 고양이들이 아직도 선반 위에 뛰어 오르고 볕이 가득한 날엔 베란다 타일 위에서 뒹굴거린다. 한 집에 오래 살고 있다보니 집안 구석 어디에도 고양이들이 없는 자리가 없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이 방 저 방 어디에나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내가 그린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 오면, 아, 그렇지, 쟤들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건 아니지, 라고 생각하곤 한다.


 

2026년 4월 21일 화요일

화요일에

자동차 앞유리와 와이퍼 사이에 꽃씨와 나뭇잎이 잔뜩 끼여 붙어 있었다. 그것을 대충 털어내고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옮겨 두려고 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아내를 따라 산책 나온 개 율리가 곁에서 맴돌며 나를 쳐다 보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사람과 개를 태우고 넓직한 근처 강변 공원에 가기로 했다. 너른 강을 보며 율리는 아주 신나게 뛰어 놀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다가와서 간신히 한 장 건진 사진을 보니 개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돌아올 때에 주유소에 들르고 싶었는데, 외출할 작정으로 나왔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갑도 신용카드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율리는 집에 돌아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깊은 밤이 되자 고양이 깜이가 내 의자를 차지하고 등받이에 기대어 기분 좋아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의자를 내어주고 나는 높이 조절 탁자를 책상 앞에 끌어 와 새벽 내내 서 있었다. 잠깐씩 음악이 지나가고 다음 곡이 시작될 때에 헤드폰 너머로 깜이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면 잠시 멈추는 듯 하다가 고양이는 이내 다시 코를 골며 늘어지게 잠을 잤다.


2026년 4월 20일 월요일

봄비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하늘이 검더니 예보대로 낮에는 비가 내렸다. 오후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하여 스튜디오 한쪽 끝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세 곡을 연주하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엔 날이 개이고 흰 구름을 흩트리며 햇빛이 밝게 내렸다. 방송사 주차장에 세워뒀던 차엔 비를 맞아 먼지 자욱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서늘했던 바람은 어느새 살랑이는 봄바람이 되어 불고 있었다.

이전에 이 스튜디오에서 몇 번 연주했었다. 이번엔 앰프를 쓰지 않고 라인 연결로만 연주하기로 했다. 넓지 않은 공간이이어서 앰프가 있어야 방청객 수십 명에게 더 생생한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었겠지만 가능한 번거로운 일을 줄이고 싶었다. 다급하게 돌아가는 생방송을 송출하는 게 목적인 세션이었으니까.
밴드 공연을 함께 만들고 있는 음향팀 두 분을 굳이 불러서 준비했던 덕분에 우리가 들으며 연주했던 사운드는 아주 좋았다. 그 소리가 실제 방송에서는 얼마나 재현되었을지는 모르겠다.

2026년 4월 18일 토요일

안산에서

 

안산에서 공연을 했다. 사 년 전에는 여기 안산 예술의 전당 바로 옆 극장에서 공연했었다. 그곳은 달맞이 극장, 오늘 갔던 곳은 해돋이 극장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실내 무대이므로 해도 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은 곱다. 오늘은 한 달 만에 펜더 울트라 II 재즈를 가지고 갔다. 지난 밤에 악기를 가방에 넣기 전에 스트링을 새로 교환하려고 했다가 무슨 일인지 상태가 좋아서 그대로 두었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악기의 스트링을 자주 갈아야 했었다. 연주를 마치면 언제나 악기를 관리하는 습관이 되어있기도 하고, 이제는 손에 땀도 나지 않아서 베이스 줄을 더 오래 쓰게 되었는가 보다.

공연을 마치고 극장 바로 옆 종합병원 길을 지나면서 오륙 년 전 그곳 장례식장에 두 번 연이어 갔었던 기억이 났다. 그 맞은 편에는 단원고 4.16 기억교실이 있다. 이틀 전은 세월호 참사 12주기였다. 이 년 전에 10주기 기억문화제에서 공연을 했을 때 하루 종일 비가 내렸던 것도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다큐멘터리 영화 <란 12.3> 을 보았다. 영화가 만들어질 때 보잘 것 없는 금액을 후원했던 덕분에 개봉 전 온라인 시사회 링크 주소를 받았다. 원래는 지난 주에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날엔 익산에서 집에 돌아왔더니 이미 볼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렸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헤드폰을 쓰고 볼륨을 높여서 영화를 보았다.
그래, 아직은 난중 亂中이지만, 수 많은 개인사들이 우연과 인연으로 얽혀서 함께 치르었던 거대한 경험의 힘은 세다고 믿고 있다.

2026년 4월 11일 토요일

익산에서

 

꽃이 가득 핀 봄날 토요일에, 오전 일찍부터 고속도로 정체가 극심했다. 나는 일부러 조금 더 먼 거리로 경로를 정했다. 경부고속도로보다 가는 길은 좀 길지만 시간은 덜 걸린다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고 있어서 중부고속도로를 선택했다. 두 번이나 긴 정체가 생겨서 도착 예정시간이 자꾸 뒤로 늦춰지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엔 처음 내비게이션이 알려줬던 시각 그대로 약속시간 한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기계의 예측이 맞았던 것인지.

한 주 전 공연에 썼던 내 오래된 펜더 재즈를 다시 가져갔다. 지난 해 내내 새로 산 베이스를 치고 있었는데 그 악기의 넥이 아주 약간 길어서 그 사이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바람에 지난 주에 연주 도중에 그만 순간적으로 프렛 한 군데를 잘못 짚고 말았었다. 이 악기를 나는 내 몸처럼 다루었었는데 이럴 수가, 했었다. 오늘은 실수 없이 잘 했다.

돌아오는 길은 경부고속도로를 선택했다. 갈 때엔 거의 네 시간이 걸렸는데 돌아올 때엔 두 시간 사십 분 운전했다. 오늘은 고속도로에서 쉬었던 적이 없었다. 휴게소 라면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어쩐지 라면 생각이 나서 집앞 가게에서 라면을 사가지고 왔다. 아직 잠들지 않은 아내를 꼬드겨 라면을 나누어 먹었는데 뭐라고 할까, 아주 맛있게 먹었다.


2026년 4월 9일 목요일

시대

토요일에 친구가 책을 선물했다.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누구의 회고록, 자서전은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본 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했었다. 친구가 책을 건네어줬을 때 습관대로 책의 한 가운데 부분을 눌러 펴보고 있다가 몇 줄을 읽게 되었다. 우선 두 사람의 대화 형식이었던 것이 의외였는데 하필 펼쳐진 페이지에 담긴 길고 자세한 각주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는 이야기와 몰랐던 사실들이 여러 이름들과 함께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책을 눈에 드는 곳에 놓아두고 사나흘을 보냈다. 저것을 읽어봐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첫 장을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온 것 빼고는 일어나지 않고 죽 다 읽어버렸다. 지난 한 세기의 미시사가 한 인물의 생애에 골고루 묻어 있었다. 내가 읽어서 얼핏 알고 있었던 역사와 내가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시대의 사건들이 영상처럼 보이는 책이었다.

이 책은 어제 오후에 읽었다.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인혁당 사법 살인이 일어났던 그날이었다. 친구에게 덕분에 좋은 책을 잘 읽었다고 메시지로 감사 인사를 보냈다.

2026년 4월 4일 토요일

용인에서

 

용인에서 공연했다. 잠을 잘 잤고 긴 시간 운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몸 컨디션이 근래 들어 가장 좋았다. 64Audio 인이어로 듣는 소리도 아주 좋았다. 아픈 데도 없고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는지 첫 곡부터 기분 좋게 연주를 시작했다. 공연 후에 동료들이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다고 말해줬다. 안 아팠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는데, 잘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에 몸 상태가 좋았던 것은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금은 우울했을 거다. 건강이 중요하다고 새삼 생각했다. 몇 년 만에 함께 외출한 아내는 리허설을 마치고 와보니 그 사이에 대기실에 음식을 한 아름 차려 놓고 있었다. 멤버들이 모여 앉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선물 같은 것은 준비하지 말아달라고 했었는데, 아내가 마음을 써주어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공연 후엔 친구들 부부와 저녁식사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생일이 부끄럽다. 십여 년 전에도 부끄러웠는데 아직도 그렇다. 더 나이가 든 다음엔 생일이 부끄럽지 않아지며는 좋겠다.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늘 묻고 있는데, 언젠가는 거기에 대답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